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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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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구민정(안그라픽스 편집장, 「메주월령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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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 마당이 다 분주하다. 가을이다.

「농가월령가」도 그렇다. 한 계절의 수고가 탐스러운 수확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장면마다 가득하다.

「농가월령가」는 조선시대 정학유가 지은 열두 달 달거리月令體 노래로, 장편 가사의 옷을 입은 ‘농업 매뉴얼 종합판’이다. 그는 달마다 운율 위에 철철이 놓쳐선 안 될 농삿일과 세시풍속을 하나하나 세세히 묘사해 두었다. 정학유는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 농부는 아니었지만 실증과 기록을 중히 여긴 실학자 아버지의 학풍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언제 밭을 갈고 씨를 뿌려 모 내고 김 매고 수확하는지, 누에 치고 가축 기르기는 어떻게 하는지, 절기별 세시풍속은 무엇인지까지 꼼꼼히 기록했다. 사대부 지식인이 한문으로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우리말 노래로 쓴 까닭은 모은 지식이 추상적인 현학으로 허공에 머물지 않고 땅에서 사람의 손으로 실현되어 뿌듯한 수확과 기쁨으로 돌아오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누구나 이 매뉴얼을 노래처럼 쉽게 부르고 익혀 때를 놓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이 풍속의 박물관을 글로 지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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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다채로운 대목이 가을이다. 입추부터 한로, 상강까지 아우르는 칠월령, 팔월령, 구월령이다. “늦더위 있다 한들 절서야 속일소냐./ 비밑도 가볍고 바람끝도 다르도다”로 처서 지나 사뭇 달라진 바람을 묘사하고, 잘 여문 알곡처럼 뿌듯한 수확의 풍경이 지상에 아낌없이 색채를 부려놓는 장면을 그린다. “백곡이 이삭 패고 여물 들어 고개 숙여/ 서풍에 익은 빛은 황운黃雲이 일어난다./ 백설 같은 목화송이 산호 같은 고추 다래/ 처마에 널었으니 가을볕 명랑하다.” 농사짓기 노래라 할 일만 가득하지 않겠나 싶었지만, 묵직한 벼이삭이 황금 파도로 일렁이고 처마에 하얀 목화와 빨간 고추가 널린 풍경이 떠올라 마음은 한가위처럼 들뜬다.

그러나 「농가월령가」의 진짜 아름다움은 그림 같은 풍경에만 있지 않다. 풍경은 사람의 일과 만나 비로소 완성된다. 음력 9월에 이르면 늦가을. “경치는 좋거니와 추수가 시급하다.” “들에는 조, 피 더미, 집 근처는 콩팥 가리”인데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려”야 하고, “아이는 소 몰리고 늙은이는 섬 욱이기”, “한 편으론 면화틀기 씨아 소리 요란하니” 쉴 틈이 따로 없다. 그렇게 「농가월령가」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지극히 현실적인 노동이 나란히 붙어 있다. 오동잎, 초승달, 귀뚜라미 소리, 황금 들판, 단풍과 국화 사이로 김매기, 벌초, 빨래, 목화 수확, 타작, 기름 짜기, 밥 짓기가 자연스레 등장한다. 한마디로 「농가월령가」의 가을은 풍요를 감상하는 계절이라기보다, 풍요를 부지런히 생활의 실체로 바꾸는 계절이다.

「농가월령가」도 그렇다.
한 계절의 수고가 탐스러운 수확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장면마다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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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가을의 일 끝에는 축제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타작 점심으로 누런 닭과 술을 준비하고 새우젓과 계란찌개, 배춧국, 무나물, 고춧잎장아찌를 차린다. 큰 가마솥에 한가득 밥을 해도 부족할 만큼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한가을에는 지나가던 나그네까지 불러 먹는다. “수고도 나눠 하고 없는 것도 서로 도와/ 이때를 만났으니 즐기기도 같이하세” 하며 모두 함께 즐기자는 대목, 아무리 일이 많아도 농사에 큰 힘을 보탠 소를 잊어서는 안 된다며 조, 피 줄기를 먹여 소를 살찌우자는 대목에 이르면 마음은 감동으로 잔잔히 일렁인다. 거둔 것은 혼자 즐기지 않고 여럿이 나누어야 즐겁다는 마음. 그렇게 우리 모두 함께 배불리 먹으려고 어쩌면 그 거센 폭풍우와 푹푹 찌는 더위의 계절을 건너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마음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내가 자주 잊고 지나치는 마음이 아닐까 돌아본다.
이제는 너무 멀리 왔다고, 나는 황금 벼이삭을 볼 수 없는 도시로 이미 멀리 떠밀려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인생에서 하룻밤에 되지 않는 일, 내 맘처럼 되지 않는 일, 그럼에도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오래 묵묵히 해나가야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결실을 꿈꾸는 농부다. 어쩌면 현대인에게 제각기 짓는 농사란 저마다 일터와 생활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자신만의 어떤 ‘일’이 아닐까. 그 일도 농사와 같아 인력만으로는 안 되고, 때론 내 마음처럼 안 되는 날씨에 낙과가 생기고 낟알이 우수수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날씨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농사를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을 제어할 수 없다고 나아갈 길을 접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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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농사 품종은 책이다. 18년째 파주에서 책을 만들어오고 있다. 농사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고 책마다 다 때가 있어, 완성되고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두근대는 발견과 뜨거운 몇 차례의 편집을 지나 수개월에서 몇 년을 돌본 후 비로소 공장에서 찍어 제본까지 마친 책을 펼쳐 드는 순간은 「농가월령가」의 가을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모두 각자의 들에서 무사히 가을에 도착하기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축제의 기쁨은 누군가와 맛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눈빛 속에 있다는 점. 나는 누구와 가을 밥을 함께 먹고 읽은 책을 함께 얘기할까. 아주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 「농가월령가」 현대어역은 글쓴이가 했습니다.
* 삽화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김흥도의 《단원풍속도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