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 바로가기

농업박물관 소식 NAMUK MAGAZINE 2024 봄호  NO.6 농업박물관 소식 NAMUK MAGAZINE 2024 봄호 NO.6

웹진 본문

과거에서온편지

15세기 농사의 지혜가
21세기 자식 농사에 던지는 교훈

강희맹의『금양잡록』종곡의에 담긴 혜안

글·사진 제공. 전성호(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 글은 강희맹의 『금양잡록衿陽雜錄』 종곡의種穀宜의 일부이다. “15세기 농사의 지혜가 21세기 자식 농사에 던지는 교훈”을 들어보자.
금양잡록 사진

『금양잡록』 중 종곡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衿陽雜錄금양잡록』 種穀宜종곡의

嘗聞諸老農曰
地多濕而腴者 宜種早 地多燥而剛者 宜種晩

苟不審燥濕之別 早晩之宜
地力與穀性 緩急 不相應 苗不成矣 何也

此特大要耳,
然明於此者 爲上農 昧於此者 爲下農也
其間只爭分毫 而收利倍萬 知要故也

일찍이 나는 금양衿陽의 노농老農들에게서
습기가 많고 기름진 땅에는 빨리 자라는 곡식 종자를 심고
메마르고 굳은 땅에는 더디게 자라는 종자를 심어야 한다는 것을
들은 바 있다.

땅의 차이를 구별 못 하거나 종자를 가리지 않고 심으면
땅이 지닌 곡식을 성장시키는 힘과
종자가 가진 성장 속도의 차이가 조화롭지 못해
그 어린싹이 끝내 자라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것은 큰 원칙으로 이에 밝은 자가 상농上農이고 어두운 자가 하농下農이다.
그 사이를 다투는 것은 터럭*의 차이로 수확량이 만 배나 벌어지는 원인을 아는 것이 핵심이다.

* 터럭: 아주 작거나 사소한 것

- 강희맹, 『금양잡록』, 1492년.

강희맹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경순景醇이요, 호는 사숙재私淑齋 또는 운송거사雲松居士라 하고, 혹은 국오菊塢라고도 불리었다. 세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시와 문장에 깊이가 있고 자세하며 온후하고 흥미가 진진하면서 매인 데가 없이 호탕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그의 문장력은 탁월하였다. 당대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은 강희맹은 왜 틈만 나면 농부로 변복하고 오늘날 안양과 금천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의 농부들과 같이 어울리며 소통하였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로서 그 알 수 없는 미래 세계를 합리적으로 예측하는 과학적 방법을 농사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1에 소개된 강희맹에 대한 인물평에 따르면 그는 한마디로 자식 농사법에 심취한 인물이다. 그는 농부의 곡식 대하는 마음과 아비의 자식 대하는 마음은 같다고 보았다. 강희맹은 자식을 훈계하는 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금양잡록』 종곡의에 실린 내용의 핵심은 오늘날의 부모가 눈여겨보면 좋은 ‘자식의 진로 선택 방법’이다. 강희맹은 경험이 많은 농부로부터 자식이 타고난 본성을 잘 헤아려 최대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혜안을 듣고, 그 과학적 내용을 글로 정리해 『금양잡록』에 남겼다. 그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마음은 농부가 농작물에 기대하는 마음과 같다고 보고 농부가 농사를 잘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방법을 분석하였다. 먼저 그는 문과에 소질이 있는 자식인지 무과에 소질이 있는 자식인지를 헤아리는 방법을 일찍 자라는 종자와 늦게 자라는 종자를 변별하는 것으로 비견하며 강조한다. 다음으로 자식이 마음껏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진로를 선택하는 것은 종자가 뿌려지는 땅에 비유하며 종자에 따라 구별하여 심을 것을 강조한다.
『금양잡록』의 핵심은 자식을 길러서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농사에서 모색한 것이다. 그는 자식 농사를 잘못 지으면 결국 굶어 죽는 환餓餒之患을 당할 것이요, 자식의 타고난 성질을 잘못 인도하여 엉뚱한 땅에 심으면 마침내 그 자식은 외롭고 위태로움의 화를 입을 것竟致孤危之禍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가 던지는 경고장을 오늘날 한국 사회에 비춰 쉽게 풀어보면, 자녀의 성질에 맞는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다. 강희맹은 빨리 자라거나 느리게 자라는 종자처럼 자식마다 성질이 있어, 성질과 반대되는 진로를 강요하면 조화롭지 못해 그 어린싹은 끝내 결실을 얻지 못한다고 보았다.
MZ세대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하로 세계적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병폐는 한마디로 ‘자식 농사 망친 사회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조기 영재 교육, 조기 유학, 조기 진학반 등 수많은 학부모가 자식이 지닌 성장 속도의 차이를 무시하고 조기교육만을 외치며 자식의 미래를 망친다. 매일 언론에 회자되는 사회 지도층의 자식 관련 문제들은 자식 농사를 망친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고전의 지혜가 아직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점에서 미래 한국 사회에 희망이 있다. 종종 언론에 보도되는 자식 농사에 성공한 집안 이야기는 강희맹이 『금양잡록』을 통해 전한 교훈을 이미 깨달은 부모의 소식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현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고 자식이 타고난 적성을 잘 헤아려 알맞은 땅에서 대기만성형 인재로 성장시킨 사례이다.
미래의 희망을 던져주는 부모들은 『금양잡록』 종곡의에서 결론적으로 강조한 자식 농사의 큰 원칙에 밝은 상농上農 부모이다. 반면에 자식의 의지와 성질과는 상관 없이 조기 유학, 조기 의대 진학반 등에 매달린 부모들은 자식 농사 원칙에 어두운 하농下農인 어리석은 부모들인 것이다.
아! 15세기 강희맹이 오늘날 한국의 어리석은 부모와 지혜로운 부모의 사이를 다투게 하여 터럭의 차이로 수확이 만 배나 벌어지는 원인을 절실히 깨닫게 하고자 함이 21세기에 고전을 되새기는 핵심인 것이다.

1 『해동잡록海東雜錄』 조선시대 학자인 권별이 저술한 인물 설화집

기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