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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박물관 소식 NAMUK MAGAZINE 2024 가을호  no.8 농업박물관 소식 NAMUK MAGAZINE 2024 가을호 n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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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있는풍경

모두의 행복을 즐겁게 가꾸는

생태적 삶의 보금자리

글·사진 제공. 강나루(씨앗바람연구소 대표)

‘씨앗바람연구소’는 사라져 가는 토종 씨앗들을 보전하고 확산하는 ‘씨앗매개자’로서 씨앗과 자연을 주제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예술 프로젝트 ‘탈립脫粒’과 3무 재배 수확물을 만날 수 있는 ‘자연그대로 농민장터’ 등을 통해 우리가 함께 지향해야 할 비물질적 가치를 전달해 나가는 중이다.

장터에서 만나는 토종밭 한끼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여러가지 농원들의 글자가 적혀있는 나무 판자 박스들

“예술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식량이 더 중요한가?”
올해 초, 유럽연합 주요국에서 농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을 때, 프랑스 농업정책 전환에 동조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에 호박수프를 뿌리며 이같이 외쳤다. 이 사건은 예술은 농업이나 식량 생산 같은 삶의 본질적인 필요와 단절된 요소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씨앗되는시간 단체사진

씨앗 되는 시간

예술과 지역 사회의 상호작용

본질적으로 예술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접근할 수 있는 표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된 20세기 중반 이후, 예술은 개인적 표현을 넘어 공공적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부터 공공미술이 확산되면서 나는 마을미술, 아트인시티, 예술프로젝트 등 지역의 공공예술 현장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특히 2007년,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충남 연기군’에서 진행된 ‘종촌-가슴에 품다’ 프로젝트에서는 신도시 개발로 사라지게 된 마을과 그곳을 떠나야만 했던 원주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매개체로서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이 지역 사회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지역민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는 예술에 대하여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예술은 경제적 가치 중심의 평가, 산업화, 실용주의 등으로 인해 일부 선입견이 있지만, 어떤 태도와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작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농업 분야에서도 예술은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예술을 통하여 보다 나은 농업과 농촌을 위한 다원적 가치들을 증진시킬 수 있다.

씨앗을 보전하고 확산하는 씨앗매개자

토종콩 식경험 워크숍에서 그린 그림들

토종콩 식경험 워크숍

다양한 공공미술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후, 나는 제주도로 이주해 여성농민회의 일원으로서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몇 해를 그렇게 보내며, 우리 시대에 사라져 가는 씨앗들을 보전하고 확산하기 위해 ‘씨앗매개자’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씨앗바람연구소’를 열었다. 제주에서 토종 씨앗으로 농사짓고 요리한 일상생활을 6년간 기록해 에세이집 『일상의 씨앗들』로 엮었고, 토종을 지켜온 어르신들을 만나러 다니며 씨앗에 대한 기록을 모아서 ‘제주도 여성농민회’와 함께 인터뷰 모음집을 만들었다. 직접 그린 씨앗 드로잉으로 만든 산책 가방과 물병 가방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가게에서 만날 수 있다. 다양한 토종 작물이 자라는 과정을 담은 사진들은 농촌의 소중한 기록으로 남았다.
또한 ‘씨앗바람연구소’는 지난해 귀농·귀촌을 탐색하는 청년 여성들에게 농촌을 경험하고 깨닫는 ‘씨앗 되는 시간’을 제공하며, 토종 곡물 농부들과 발효 요리사를 연결해 ‘토종으로 만나는 발효생활자’, ‘장터에서 만나는 토종밭한끼’ 같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능동적인 생의 태도, 탈립

최근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에서 진행된 〈대지와 바람의 조각〉 전시에서는 제주에서 오래도록 이어졌으나 이제는 거의 사라져 만나기 어려운 제주 토종 잠두콩을 주제로 한 설치 작품 ‘탈립脫粒’을 선보였다. 전통적으로 재래종 곡물의 탈립 현상*은 수확량이 줄어드는 문제로 여겨졌지만, 나는 오히려 스스로 생명을 이어가려는 씨앗의 주체적인 성질에 주목했다. 삶이 보다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태도와 자기 주체성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탈립脫粒’ 작업에서는 생명 스스로 이어지는 순환과 자립의 상징성을 담아, 우리가 지향해 나아갈 삶의 방식에 대한 영감을 전달하고자 했다.

제주세개자연유산센터 내 전시 작품들

직접 농사지은 토종콩으로 제작한 작품 ‘탈립脫粒’,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내 전시

* 탈립 현상 곡류가 이삭이나 줄기로부터 떨어지는 것

생태적 삶의 보금자리,
‘자연그대로 농민장터’

씨앗을 이어가는 일은 자연스럽게 농업과 농촌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지키고 연결해 가는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공동체적 활동으로 확장되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연그대로 농민장터’를 연다. 2018년 가을 제주도에서 생태적 가치를 추구하는 농민들이 스스로 시작한 이 장터는 최소 3무 재배無제초제, 無화학비료, 無화학농약를 지키는 고집스러운 환경 출점 원칙이 있는 농부 시장이다. 매년 봄마다 모두 어우러져 시농제를 올리고, 씨앗 나눔도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매주 그 시기에 파종하는 제철 씨앗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얼마 전에는 버려진 귤 상자를 다듬어 농민들이 직접 그 위에 손 글씨를 그렸다. 느리게 진행된 이 작업은 일의 효율성보다는 협력과 협동을 의도한 것으로, 농촌 공동체의 커뮤니티 예술과 다르지 않다. 농민장터의 출발은 소농의 판로 확보에 초점을 맞춘 직거래 장터였으나, 곧 300회를 앞둔 현재는 농가 소득을 위한 경제적 효과뿐 아니라 생태적인 농촌 의식주 문화를 나눌 수 있는 ‘모두의 행복을 즐겁게 가꾸는 생태적 삶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자연그대로 농민장터’ 공동체에는 단순한 물질적 생산 이상의 깊은 정서적 유대감이 흐르고 있다. 농민장터에 모이는 사람들은 서로 어려움을 나누고, 돕고, 지지하며 서로 간의 존중과 감사, 즐거운 관계를 형성해 가며 일상에 활력을 나눈다. 이러한 비물질적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필수적인 요소로 물질적 가치만큼이나 중요하고, 결국 반복되는 일상의 행복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것은 ‘자연그대로 농민장터’가 외부 지원 없이 농민들 스스로 시작하고 지금까지 자력으로 이끌어온 시간의 힘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씨앗바람연구소’는 앞으로도 농업과 농촌의 현장에서 밀도 높은 경험과 예술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가 함께 지향해 나아갈 비물질적 가치를 전달하고, 지속 가능한 씨앗들의 보전과 확산을 위한 유무형의 활동들을 이어가고자 한다.  

자연그대로 농민장터 단체사진

작년 봄, 200회를 맞이했던
‘자연그대로 농민장터’ (2023.3.25.)

박성인 농부님의 시 명함

농민장터 ‘가장자리농원’
박성인 농부님의 시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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