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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온 편지

‘과거에서 온 편지’는 농업에 관한 옛글을 소개해 현대인에게 농업의 중요성과 삶의 교훈을 남기며,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가치를 전달합니다.

풍년이 들어야
노인이 편안하다

글.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새해 첫날을 맞이해 어머니께서 오래도록 사시기를 빈다. 오늘 건강한 얼굴을 뵈니 늙지 않으셔서 무척이나 기뻐서. 이를 넓혀 모든 노인을 기쁘고 편안하게 하려고 한다. 노인이 기뻐하며 편안하게 지내려면 풍년이 들어 곡식이 풍성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농민을 위로하는 일은 노인을 기쁘게 하는 바탕이 된다.
4일이 신일*이 되면 곡식이 잘익고, 10일이 신일이 되면 곡식이 잘 영근다고 한다. 이는 지난해에 증명되었으니 올해에도 곡식이 잘 영글 것으로 기대한다. 하늘이 나에게 태평한 세상을 주셨으니 나도 농사일을 부지런히 해야겠다. 소망하는 바를 따라서 응하는 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해마다 작년이나 올해와 같을 것이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 없을 것이다. 농부의 경사는 자식들의 경사요. 자식들의 경사는 조정**의 경사이다.

- 향약윤음, 1797년 새해

* 신축일, 신묘일, 신사일 등 천간이 신辛인 날
** 임금이 신하들과 나라의 정치를 의논하거나 집행하는 곳

「향례합편」의 첫머리에 실린 정조의 윤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향례합편」의 첫머리에 실린 정조의 윤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조는 새해 첫날이 되면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나 윤음을 전국에 반포했다. 정조는 국왕으로 있는 동안 24번의 새해를 맞았고, 총 15차례에 걸쳐 새해 첫날에 권농 교서나 권농 윤음을 반포했다. 교서와 윤음은 국왕이 신하와 백성에게 내리는 명령서지만 윤음은 교서보다 훈계의 의미가 더 강했다.

1797년 새해를 맞아 정조는 이 윤음을 반포했다. 윤음의 원래 제목은 「항약윤음鄕約綸音」으로 향약의 조례를 반포하며 내린 윤음이라는 뜻이다. 정조는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당대의 풍속을 새롭게 하고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인륜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오륜의 실천을 강조하는 『소학』과 『오륜행실도』를 전국에 배포해 가르치고, 어린 사람이 연장자를 공경하는 향음례와 어려운 이웃을 서로 도와주는 향약을 시행하라고 당부했다.

이보다 2년 전인 1795년 2월,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으로 행차해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고, 화성행궁의 봉수당 건물에서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열었다. 그리고 국왕이 전 백성과 함께 효도를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80세 이상의 노인을 위한 양로연을 개최하고 효자들을 표창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일시적인 행사로 올바른 정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륜을 실천하고 이웃을 도와주려면 농사를 잘 지어 풍년이 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당시 국가의 기틀은 농업이어서 풍년이 들어야 가정이 풍요롭고 국가 재정도 튼실해질 수 있었다. 또한 가정 경제가 풍요로워야 집안의 노인을 제대로 봉양할 수 있고, 국가 재정이 튼실해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조는 매년 첫 번째 신일이 되면 사직단으로 행차해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인 기곡제祈穀祭를 지냈다.

정조가 경건하게 기곡제를 지낸다고 그 해의 풍년이 보장되지는 않았다. 이에 정조는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나 윤음을 수시로 반포하면서 ‘수리水利 강화’, ‘토질에 적합한 경작’, ‘농기구 개선’을 강조했다. 수리 강화는 정비와 관리를 포함해 수리시설을 개선하는 것이며, 토질에 적합한 경작은 각 지역의 풍토에 적합한 작물을 골라 경작하고 지역 특성에 맞게 경작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의미한다. 농기구 개선은 농기구의 개량을 통해 생산성을 늘리는 것을 의미한다.

정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농서대전農書大全을 편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서울과 지방에 있는 농서를 널리 수집해 우리나라의 형편에 맞는 새 농서를 집대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농서를 편찬하는 일은 세종대에 『농사직설』이 편찬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농사직설』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관찰사가 각지의 농법을 정리해 올린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정조의 농서는 각 지역의 경력 있는 농부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정리해 올린 농서가 바탕이었다. 따라서 정조의 농서대전은 각 지역의 실제 농사 관행과 경험을 정리해 지역 농법을 종합했다는 특징을 가졌다. 그러나 이 사업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고, 박지원의 『과농소초』나 박제가의 『북학의』와 같이 국왕에게 올렸던 농서의 원고만이 남았다.

다시 윤음으로 돌아가 보자. 정조는 회갑을 넘긴 어머니가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시기를 바라는 효자였다. 그러나 정조의 효는 자기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모든 관리와 백성을 다스리는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효도의 범위를 넓혀 전국의 노인을 편안하게 모시려 했다. 그리고 백성이 노인을 기쁘고 편안하게 모시려면 매년 풍년이 들어야 했다. 정조가 농사를 부지런히 권장했던 이유는 백성이 평안하게 사는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자기가 다스리는 세상이 태평성대가 되는 것은 어머니인 혜경궁에게 제대로 효도하는 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