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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박물관의 유물, 체험, 교육 등을 소개해 즐길 거리를 더욱 풍부하게 보여드립니다.

농절農節을 가득 담은 그릇, 명품 해시계

앙부일구

글. 이용삼(충북대학교 명예교수)

예로부터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농경 사회에 꼭 필요한 달력은, 농사의 적절한 시기를 알 수 있도록 24기를 사용하는 태양력이다. 무더운 여름의 절기는 입하를 시작으로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다.
하지는 양력으로 매년 6월 22일 무렵이며, 일 년 중 정오의 태양 고도가 가장 높다. 낮의 길이가 서울 기준 약 14시간 46분이나 되어 일사량도 가장 많고 지표면에 열이 쌓이기 때문에 하지 이후 기온이 점점 높아진다. 이 기간 농부들은 장마나 가뭄을 대비해야 하는 매우 바쁜 시기다.

앙부일구 구조

그림 1. 앙부일구 구조

그러나 달력의 날짜는 한 달의 길이가 약 29.5일인 태음력을 사용했다. 따라서 큰달은 30일, 작은달은 29일을 사용하며 어떤 해는 윤달까지 겹쳐 1년이 13달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한 해 동안 농사일에 바쁜 백성에게 국가는 매년 24절기의 날짜를 알려주는 태음태양력 달력을 발행했다.
특히 조선 왕조는 천체의 모양을 보고 백성에게 때를 내린다는 관상수시觀象授時를 중요한 책무로 여겼으며, 제왕된 자가 백성들에게 시간과 절기를 알려주는 것이 가장 앞서 수행해야 할 권리이자 의무였다. 세종 16년 1434년,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창제한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오목한 그릇에 비친 해 그림자를 이용해 태양력의 달력인 24절기와 시간을 재는 해시계다.
당시 앙부일구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시각선 위에 12지 중 낮 문자寅,卯,辰,巳,午,未,申,酉,戌를 표기하지 않고 동물의 그림 문자로 표현했다. 그뿐만 아니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종묘 거리와 혜정교의 돌로 만든 일구대日晷臺 위에 설치했다. 이처럼 앙부일구는 세종의 애민정신이 가득 담긴 조선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로서 백성들이 사용하는 시계였다.
당시에 시간과 책력은 국가에서 관리하고 배포했지만 앙부일구를 보면 농사에 중요한 24절기와 1년 동안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알 수 있어 낮과 밤의 길이까지 가늠할 수 있었다. 다양한 기능으로 창제한 앙부일구는 농경사회에 꼭 필요한 달력을 담고 있는 그릇이었다. 앙부일구의 일반적인 구조는 그림 1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오목한 반구의 수영면受影面, 영침影針과 지평환地坪環, 십자 받침대와 용주龍柱로 구성되어 있다.

태양 고도의 변화와 절기선의 원리를 보여주는 앙부일구 단면도
태양 고도의 변화와 절기선의 원리를 보여주는 앙부일구 단면도

그림 2. 태양 고도의 변화와 절기선의 원리를 보여주는 앙부일구 단면도

영침의 그림자가 맺히는 수영면에는 시각선과 절기선이 그려져 있으며 용주와 받침대는 본체를 받치고 있는 형태다.
앙부일구는 다양한 기능을 갖춘, 실용적이며 과학적으로 제작된 정교한 해시계지만 그 원리는 간단하다. 태양의 운행은 둥근 하늘의 천구상에서 볼 때, 매일 동쪽 지평선에서 떠서 서쪽 지평선으로 지고 있으며, 1년 동안 계절에 따라 남중 고도는 동지 때 가장 낮고 하지 때 가장 높아진다. 그림 2와 같이 태양의 궤적을 천구의 중심으로 향하게 하여 지평면 밑에 투영해 보면 오목한 반구의 수영면에 태양의 궤적을 표기할 수 있다. 앙부일구의 반구 중심에는 북극을 향해 뾰족한 영침이 위치하며, 이 영침의 그림자를 통해 태양 운행 궤적이 수영면에 투영된다. 시각선은 수직으로 그어져 절기선과 시각선이 바둑판 모양처럼 그어져 있다. 절기선은 24절기 중 양 끝에 동지선과 하지선이 있다. 그 외 22개 절기선은 중심에 춘분선과 추분선이 동일하게 중복 적용되고 나머지 절기선들도 2절기씩 중복 사용되어 모두 13개의 절기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기마다 태양의 고도가 변하면서 영침의 그림자는 각각의 절기선을 따라 움직인다. 각 절기선은 지평환에 표기한 24절기와 연결되어 절기를 표시한다. 시간의 측정은 절기마다 태양이 지평선에서 뜨는 시간부터 지는 시간까지 영침의 그림자가 이동하는 대로 따라가며 시간까지 측정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일출·일몰 시간을 확인할 수 있고 절기마다 밤낮의 길이도 알 수 있게 된다.
세종의 애민 정신을 가득 담고 있는 앙부일구는 아쉽게도 다 사라졌지만, 그 이후로 계속 제작하여 보물급의 앙부일구가 여러 점 남아있다. 그중 하나로서 독특한 구조로 간편하게 제작한 명품 앙부일구가 부퍼탈 시계 박물관Wuppertal Watch Museum에 소장되었다가 2021년 11월 국립농업박물관으로 귀환했다.
이 앙부일구는 높이 15cm, 지름 32.4cm, 중량 10.9kg이며 모든 부품이 제 위치에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구조와 특징을 살펴보면 반구형의 수영면에는 시각선과 시간이 표기되어 있고 절기선도 그어져 있다. 수영면에는 사용하는 지역에서 북극고도(위도)를 향하도록 영침이 한양의 위도에 맞게 비스듬히 조립되었으며, 그 뾰족한 끝이 반구 중심에 정확히 위치한다. 시각선은 96각법刻法으로 현행 시간으로 15분 간격인 1각 단위의 눈금으로 구분되어 있다.

국립농업박물관 앙부일구의 영침, 용주의 모습 속에서 돋보이는 예술적 형태
국립농업박물관 앙부일구의 영침, 용주의 모습 속에서 돋보이는 예술적 형태

그림 3. 국립농업박물관 앙부일구의 영침, 용주의 모습 속에서 돋보이는 예술적 형태

절기선은 일반적으로 24절기 중에 하지선과 동지선 이외는 공통으로 두 번씩 사용하여 13개로 표기하고 있지만 이 유물은 11개의 절기선만 그어져 있다. 실제로 천구상에서 매일 태양 고도의 변화율이 가장 작은 동지와 하지 전후의 절기 부근에는 절기선의 간격이 좁아 생략한 것이다.
이 유물의 가장 큰 특징은, 몸체를 떠받드는 밑받침이 일반적인 형태에 따라 십자 밑받침 끝에 4개의 용주로 연결된 것과는 다르게, 그림 4와 같이 3개의 밑받침이 중심과 이어져 있으며 밑받침 끝에 3개의 용주가 받치고 있다. 밑받침에는 수평을 쉽게 확인하도록 물홈의 못이 파여 있고 세 받침 사이로 수로처럼 물이 통하도록 제작되었다. 용주의 구름 문양은 정교하며, 예술적으로도 품위 있고 우아하게 장식되어 몸체와 지평환 둘레를 떠받들고 있다.
일반적인 4개의 용주가 아닌 3개로 제작한 이유를 추측해보면, 앙부일구를 태양열을 담는 그릇으로 상징화하여 숯불 화로의 발처럼 만든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태양 속의 삼족오와 같은 민속적인 공예품이 연상되기도 한다.

국립농업박물관 앙부일구 받침

그림 4.국립농업박물관 앙부일구 받침

고택 뜰 받침 석대 위의 3각 청동 받침

그림 5.고택 뜰 받침 석대 위의 3각 청동 받침

필자는 이 앙부일구를 설치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받침 석대를 옛 한양 도성 내 고택 뜰에서 발견하여 검증하고 있는데, 받침 석대 위에는 이 유물을 설치하기에 꼭 맞는 규격의 3각 청동 받침이 설치되어 있다 그림 5. 이 받침 석대를 사용했다면 방향을 쉽게 맞출 수 있어 굳이 4개 받침대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간편한 설치가 가능하다.
이 유물에 표기된 문자와 그어진 선들은 은사銀絲를 넣은 것으로 모두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일부 선과 방위를 생략하여 간소화한 면이 있지만 실제 해시계의 기능인 시간과 농사 절기를 알 수 있는 정교한 기능을 잘 갖추고 있다. 국내 일부 박물관에 보물급으로 소장되어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앙부일구와 같이 영침과 용주, 받침대의 작품성은 제작 솜씨가 뛰어날 뿐 아니라 예술적인 우아함까지 겸비한 품격 높은 명품 해시계다.
앙부일구를 통해 서양 과학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 우리 선조들이 일구어낸 농경 사회의 전통 과학 기술이 많은 관심을 받으며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