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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있는 풍경
‘문화가 있는 풍경’은 우리 박물관에서 진행한 포럼인 <찬란한 농업유산의 부활>에서 나눈 내용을 필두로, 6차 산업으로써의 농업과 농촌을 널리 알립니다.
농부가 아로새긴 대지의 예술
다랑논
글-사진제공. 김진한(다랑협동조합)
밀양 다랑협동조합 김진한 농부는 전통 농사의 가치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다랑논 공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철마다 논에 모여서 모판 만들기, 모내기, 김매기, 추수를 한다. 다랑논에서 각자의 미래를 빛낼 가치의 씨앗을 찾아내는 사람들과 함께 다랑논도 제 모습을 회복하길 바란다.
산비탈에 기대어 다듬어진 논둑을 층층이 쌓아 만든 계단식 논을 ‘다랑논’이라 부른다. 그 모습이 멀리서 보면 사다리 같기도, 하늘에서 보면 지문이나 조각보 같기도 하다.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다랑논의 풍경을 보고 ‘농부가 대지에 아로새긴 예술 작품’이라 표현한다. 오랜 세월 척박한 땅을 일궈낸 농부의 억척스러움을 상징하지만 그 안에는 숨은 가치가 보물처럼 박혀 있다.
다랑논에서 모심기를 직접 하는 아이들
다랑논의 다원적 가치와 현실
다랑논은 산과 들 사이인 중산간에 자리한다. 가파른 경사지를 계단식으로 만들었기에 토양의 침식과 붕괴를 막고 홍수를 방지하며 지하수를 함양한다.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제공하고 생태계를 유지해 생물 다양성을 보전한다. 아름다운 경관과 휴식 공간을 조성하며 특유의 농경 문화를 지니고 있다. 산의 첫 물을 받아 농사짓기에 깨끗하고 맑은 농산물을 길러낼 수도 있다. 특히 기후 위기 시대에 맞춰 화석 연료를 최소한으로 사용해 지속 가능한 농경을 실현할 수 있어 미래 가치도 뛰어나다. 그것을 인정받아 청산도 구들장논은 농업 유산 제1호로 등재되었고 남해 가천마을은 명승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의 식문화가 바뀌면서 쌀 소비가 줄어들자 다랑논의 풍경도 달라졌고, 논이 과수원이나 하우스 또는 전원주택으로 바뀌어 갔다. 농촌의 고령화로 일손이 부족해지자 방치되는 곳들도 늘어났다. 논이 버려지기 시작하면 나무가 들어서고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 내면서 다랑논을 다시 지켜갈 수 있을까?
다랑논 공유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는 참자가들
가치를 나누는 다랑논 공유 프로젝트
수십에서 수백 명이 함께 짓던 공간에 이제 농부를 손꼽아 봐도 열을 넘지 않는다. 마을의 농부만으로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사람들을 불러오기로 했다. 주말농장에서 텃밭을 가꾸는 사례는 많지만 논을 나누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사실 매주 들러서 보살펴야 하는 밭농사보다는 논농사가 편하다.
그래서 스무 평씩 논을 공유해 일 년에 모판 만들기, 모내기, 김매기, 추수하기 총 네 번만 필수적으로 참여하는 농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토종 볍씨로 모판을 만들고 자신들의 팻말을 만들어 논에서 벼를 키운다. 가을이 되면 수확해서 쌀을 가져가며 벼의 한해살이를 함께한다.
참가자들은 다양하다. 청년 여성 한 분이 도전한 경우도 있고 은퇴 후 귀농을 준비하는 부부나 친구끼리도 찾아온다. 가장 많은 참가자는 대부분 아이가 있는 가족이다. 아이들에게 시골과 벼농사의 풍경을 경험시켜 주고 싶은 분들이 많다. 지역 초등학교나 도시 단체가 함께 신청하기도 한다. 처음 참가하는 아이들은 논이 낯설어서 겁을 내거나 때론 울기도 한다. 하지만 논을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점점 익숙해지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보람을 느낀다.
다랑논과 토종벼 전시회에서 소개한 이음의 답과 다랑미
미래를 담은 씨앗들
조각조각 나뉜 논의 숫자만큼이나 다랑논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도전도 이루어진다. 대표적으로는 토종벼다. 밀양에는 ‘전국토종벼농부모임’에서 함께하는 경남 토종벼 채종포가 있는데 매년 30~40여 종의 토종벼를 키운다. 토종벼는 고유의 까락(벼수염)이 있어 꽃이 피는 8월쯤에는 저마다 개성을 가진 다양한 색으로 가득해진다. 검은 빛깔의 북흑조와 아롱벼, 붉은 빛깔의 다백조와 무안도, 새하얀 노인도와 여우쌀벼 등 다채로운 색깔 덕분에 논 전체가 비단 물결로 출렁인다.
물길이 끊기거나 밭으로 변한 곳에는 토종 밭작물이 자리를 잡는다. 특히 콩이 많은데 복다리콩, 검정새콩, 쥐눈이콩, 오리알태, 제비콩 등이다. 토종은 보통 종자로 나눔을 하는데 농부가 아닌 사람들은 발아시켜 모종을 키우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아예 토종 작물의 모종을 키워 나누기도 한다. 밭작물은 한 작물을 선정해서 사람들과 함께 짓는다. 가령 감자의 경우에는 3월에 준비를 시작해서 6월 말 수확할 때까지 별도로 참가자를 모아 진행한다. 대부분 농지는 대량화와 기계화에 맞게 경지를 정리해서 사용한다. 하지만 토종 작물은 다품종 소량 생산이 적합해서 오히려 다랑논과 잘 어울린다. 또 하나는 플라스틱 대체 작물이다. 수세미가 대표적인데 원래 식물로 사용했던 많은 소모품이 플라스틱으로 바뀌면서 농부가 키우는 작물의 숫자도 줄어들고 말았다. 플라스틱이 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이 문제시되는 요즘, 다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작물을 찾아서 재배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밀대나 보릿대로 빨대를 만들었고 왕골과 골풀의 활용도를 조사하기도 했다.
다랑논에서 자라나는 다양한 품종의 토종벼
함께 걷는 사람들
버려지는 다랑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이유는 이곳에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다. 조합원이 모이면서 각자가 생각하는 비전과 아이템도 다양해졌다.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마을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마을과 다랑논을 찾는 사람들이 저마다 미래의 가치를 담은 씨앗을 찾았으면 한다. 그 씨앗을 땅마다 조금씩 뿌려 나간다면 다랑논도 점점 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갈 것이다.
다랑협동조합 농부 김진한
다랑협동조합은 감물리 다랑논에서 자연 재배로 토종벼를 키우는 농부 모임이다. 다랑논으로 산과 들을, 시골과 도시를, 자연과 사람을 이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