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온 편지

‘과거에서 온 편지’는 농업에 관한 옛글을 소개해 현대인에게 농업의 중요성과 삶의 교훈을 남기며,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가치를 전달합니다.

삶의 주인이 되는 농사일

글.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무릇 먹고 살기를 꾀하는 일은 모두 낮고 더럽다. 다만 원포에서 초목을 기르는 한 가지 일만큼은 지극히 맑고 고상하다. 비록 호미 들고 삿갓을 썼어도 더욱 귀함을 느낀다. 하지만 한번 저잣거리에 나와 닭을 묶어두고 베를 걸어둔 채 살지고 수척한 것을 평하거나, 올이 거칠고 고운 것만 따지게 되면 어느새 큰일을 다 그르치고 만다.


凡謀食之事, 皆鄙俚. 唯園圃毓草木一事極淸高. 雖復戴耡荷笠,
益覺是貴. 一出市門, 撞雞揭布, 評其肥㾪, 議其麤細, 已大事去矣.



연꽃을 심는 것은 이를 빌려 감상하는 데 지나지 않으나 벼를 심는 것은 먹거리를 제공해 줄 수가 있다. 그 쓰임새의 허실이 서로 현격하게 다르다. 하지만 논을 넓혀 연을 심는 못을 만드는 사람은 그 집안이 반드시 번창하고, 연 심은 못을 돋워 논으로 만드는 사람은 그 집안이 반드시 쇠미해진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를 통해 큰 형세가 쇠하고 일어나는 것이 인품의 빼어나고 잔약함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소한 송곳이나 칼끝 같은 이해쯤은 깊이 따질만한 것이 못된다.


種蓮不過借玩賞, 種稻可以給餽餉. 其用之虛實相懸也. 然廓稻田以爲蓮沼者,
其家必昌, 夷蓮沼以爲稻田者, 其家必衰. 斯何故也. 是知大勢衰旺,
繫乎人品之俊孱, 小小錐刀之利害, 未足深爭也.

「다산이 제자 황상에게 써준 증언첩(茶山翁書貽黃裳帖)」 중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제자 황상을 위해 써준 여덟 항목의 증언贈言 중 두 단락이다. 증언이란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과 당부를 담아 맞춤형으로 써준 글이다. 다산은 낡아서 못 입게 된 옷의 천 조각을 잘라 제자마다 그에게 꼭 맞는 이야기를 친필로 적어 예쁜 책자로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황상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곁눈질하지 않고 평생 공부를 계속했던 제자다.


다산은 전원생활에서 원포의 경영을 가장 중시했다. 다산의 정의에 따르면 원포에서 원園은 과일나무를 심는 것, 포圃는 채소를 기르는 것을 말한다. 과수원과 채마밭을 가꾸는 일이 어째서 중요한지를 다른 여러 글에서도 되풀이해 설명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은 대체로 구차하고 비루하다. 그것으로 돈을 벌자면 내 속을 다 내주어야 한다. 하지만 원포의 일만큼은 맑고 고상하다. 건강한 땀의 일이고, 또 생명의 경이를 온몸으로 만나는 과정이어서다.


다산은 잗다란 이익에 얽매여서 삶의 맑은 운치를 맞바꾸지 말라고 제자에게 주문했다. 비록 넉넉지 않더라도 생명을 기르는 일에서 느끼는 경이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들어간 돈이 얼만데’나 ‘손해는 볼 수 없다’는 마음이 먼저 끼어들면 그사이에 전원생활의 기쁨은 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농업으로 하는 경제 활동을 긍정하되 돈벌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됨을 경고했다.


두 번째 단락도 묘한 말이다. 논을 넓혀 벼를 심으면 쌀이 그만큼 더 많이 생산된다. 그런데 반대로 논을 확장해 연을 심는 못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연꽃이 보기에 예뻐도 가을에 거두는 연근의 실익이 벼의 그것만은 못하다. 셈법은 간단하지만, 숫자가 언제나 삶의 이치에 맞는 것만은 아니다. 논을 넓혀 연을 심은 사람은 흥하고, 연 심은 못을 돋워 논으로 만든 사람은 쇠한다.


실학자의 말로는 뜻밖의 발언이다. 이는 삶의 운치와 경제적 이해의 엇갈림을 말하려 했기 때문이다. 논을 확장하는 것이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겠지만, 그 일로 삶에서 맑은 운치와 노동의 기쁨을 잃게 된다면 결국 다 잃은 것과 같다. 그러니까 이 말은 경제 활동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짓더라도 삶의 천진한 기쁨이 스며들 여백은 늘 확보해두어야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 이끗에 끌려다니면 지극히 맑고 고상한 원포의 사업도 낮고 더러운 일이 되고 만다. 이를 놓칠 경우, 돈을 못 벌면 빚쟁이가 되어 슬프고, 돈을 잘 벌어도 속물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농사일도 도시 노동자의 고단한 밥벌이와 다를 바 없다.


농사는 마음의 대본大本을 세우는 일이다. 묵묵히 흘리는 땀방울을 지겨운 노동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을 받쳐주는 지극히 소중한 사업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