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선비들이 차 한 잔에 담은 풍류
고려 시대 선비들에게 꽃은 단순한 식물 그 이상이었다. 그들은 꽃을
가꾸고 감상하는 행위를 고상한 취향이자 정신 수양의 방법으로
여겼다. 문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시를 보면, 꽃을
통해 내면을 성찰했던 선비들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선비들에게
꽃을 바라보는 일은 단순한 시각적 감상이 아니라, 복잡한 세상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었다.
선비들은 차를 마시는 순간에도 꽃과 함께하기를 원했다. 고려
시대를 기점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다도茶道 문화는 점차
우리만의 독창적인 예술 분야로 발전했다. 선조들은 차 고유의 맑은
빛깔이 더욱 돋보일 수 있도록 비취색의 고려청자를 만들어냈다.
나아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든 꽃을 감상할 수 있도록, 청자 다구에
다양한 방식으로 꽃의 형상과 무늬를 새겨 넣었다.
국화문 합
한눈에 반한 꽃무늬 고려 청자
어느 날, 국립농업박물관에서 교육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서
심미성 있는 유물을 찾던 중, 간결하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청자 탁잔잔과 잔받침’과 국화무늬가 정교하게
그려진 ‘합그릇’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진만 보아도 청자의 은은한 빛깔과 깔끔한 형태가 돋보여, ‘이건
꼭 우리 박물관이 소장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객을
위한 전시는 물론, 현대적인 감각의 문화상품으로 활용하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유물이었다.
하지만 유물이 박물관의 성격과 딱 맞는다고 해서 덜컥 구입할
수는 없다. 전문가와 함께 보기 전까지는 진위 여부도, 가격의
적정선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물관에 꼭 필요한
유물이 경매 시장에 포착되는 순간부터 유물팀은 분주해진다.
치열했던 경매, 마침내 우리 품으로
가장 먼저 전시 및 유물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해당 유물이 박물관
소장품으로 적합한지 엄격하게 심의한다. 심의를 통과하면 실물을
확인하러 경매사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경매 유물은 실물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진위를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한 분야를 연구해 온 전문가들과 동행하여 유물의 상태와
진위, 적정 가격을 매우 치밀하게 감정한다. 이렇게 결정된 감정가를
넘지 않는 선에서 경매에 참여한다.
마침내 경매 당일, 긴장감 속에 수차례의 뜨거운 경합이 이어졌다.
가슴을 졸이던 순간이 지나고 낙찰을 알리는 망치 소리가 울렸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꽃 모양 청자 탁잔과 합이 마침내
국립농업박물관의 새로운 가족이 되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물건에서 오늘날의 이야기로
실물로 마주한 유물은 도록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정교했다. 이번에 소장한 꽃 모양 탁잔은 찻잔과 받침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잔 받침의 외형은 꽃의 형태를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찻잎 등을 담았던 합에는 미감을 높이기 위해 국화 무늬를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사실 도자기는 구울 때 수축하기 때문에, 뚜껑과 본체의 크기와
무늬가 자로 잰 듯 딱 맞아떨어지게 만드는 기술은 고난도다.
이 합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고려 시대 도자 장인들의 솜씨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했는지 탄성이 절로 나온다.
훗날 국립농업박물관에서 이 고려청자 탁잔과 합을 마주하게 된다면,
잠시 눈을 감고 옛 선비의 시간을 상상해 보시길 바란다. 정성껏
덖은 차 한 잔을 청자 잔에 따르고, 은은한 꽃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던 그 고요한 시간 말이다. 그 순간 유물은 박제된 ‘과거의
물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깊은 교감을 나누는 하나의 생생한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