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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달이 이어지는 농촌의 한해
『농가월령가』를 통해 본 순환적 삶의 가치
정월령 부분.
ⓒ한국학중앙연구원
농가월령가 서문.
ⓒ한국학중앙연구원
일 년의 풍년 흉년 예측하기 어렵지만
사람 힘이 극진하면 하늘 재난 면하는 법
서로 격려하고 힘써 게을리 굴지 마오.
일 년 계획 봄에 있으니 모든 일을 미리 하소.
농기구 다스리고 농우農牛도 살펴 먹여
재거름 재워 놓고 한쪽으로 실어 내며
봄보리엔 오줌 치기 설 전에 힘써 하소.
늙은이 근력 없어 힘든 일은 못 하여도
낮이면 이엉 엮고 밤이면 새끼 꼬아
때맞춰 지붕이면 큰 근심을 덜겠구나.
- 「정월령」
십이월은 계동이라 소한 대한 절기로다.
눈 속 산봉우리 해 저문 빛이로다.
설 전에 날이 얼마나 남았는가.
집안의 여인들은 세시 의복 장만한다.
무명 명주 끊어 내어 온갖 물색 들여 내니
자주 보라 송화색松花色에 청화靑花 갈매葛梅
옥색이라.
한편으로 다듬으며 한편으로 지어 내니
상자에도 가득하고 횃대에도 걸었도다.
입을 것 그만하고 음식 장만하오리라.
떡쌀은 몇 말이며 술쌀은 몇 말인가.
(…중략)
- 「십이월령」
운포 정학유1786~1855의 작품으로 알려진 가사
『농가월령가』에는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하다. 1,000구가 넘는 장편인
데다 월령月令이라는 형식에 맞춰 농가에서 1년 동안 해야 할
일들을 순차적으로 노래한 독특한 구성 방식, 농서農書 수준의
농사법과 세시풍속을 상세하게 기술한 내용의 측면, 작가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둘째 아들이라는 점까지 구성과 내용은 물론
산출 배경마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하다.
이러한 매력 외에도 『농가월령가』는 전근대 시기 농민들의 삶의 지혜와
가치관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는 이를 작품에 드러나는
‘시간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농가월령가』에는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직선을 그리듯 돌진하는 삶이 아니라, 사계절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자연처럼 하나의 원을 반복적으로 그리듯 순환하는 삶에 대한 지향이 담겨
있다1.
“정월正月은 맹춘孟春이라 입춘立春
우수雨水 절기節氣로다 / 산골짝 개울가엔 눈과
얼음 남았으니”로 시작하는 정월령은 초봄의 모습을 보여 주는 동시에
지난겨울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두 계절이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끊어질 듯 이어져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완연한 봄은
아닐지라도 “일 년의 계획이 봄에 달렸으니” 부지런히 한 해를 준비해야
한다는 언급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이는 농사가 한두 해 동안 일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근본[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기에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돌아오듯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의식의 소산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농가월령가』에 등장하는 세시풍속이
주로 ‘놀이’의 형태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놀이는 구성원들이
함께 즐기는 ‘동락同樂’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온 마을이 모여서 즐기는 강신講信날의 풍경2에 이러한 장면이 극대화되며, 설을 준비하는 「십이월령」에서도 의복과
음식 장만부터 아이들의 참새잡이까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처럼 달마다 등장하는 세시풍속과 놀이의 장면은 노동과 즐거움의 결합을
통해 고된 농사일의 피로감을 덜어 주고, 다음의 노동으로 유인하는 완충
효과를 가져다준다. 지속적인 노동을 가능케 함으로써 순환하는 삶의
리듬을 더욱 견고하게 유지 하려는 의도인 셈이다.
이렇듯 순환하는 삶의 리듬을 지키는 것은 곧 삶의 안정성 유지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자연재해를 비롯한 잦은 위기에 노출되어 있었던
당대의 농민들은 위험을 감수한 이익의 극대화보다는 생존의 한계선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안전제일의 원칙을 추구했다. 더 높은 평균수입을 창출하는
것보다 실질 수입의 안정성이 훨씬 강력한 목표였다. 대부분의 농사일이
집단노동의 형태로 진행되었음을 상기한다면, 농민 개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한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요컨대 전근대 시기 농촌공동체가 지향했던 삶의 방식은 이익의 극대화가
아닌 도덕적 가치의 극대화를 통한 공동체 전체의 안정적 삶의 유지, 즉
‘공존共存’의 추구였다. 『농가월령가』에는 이러한 당대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으며, 이는 파편화된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
김우창, 「다시 생각하는 월령의 삶」,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https://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48435&rid=245).
2 “술 빚고 떡 하여라, 강신講信날 가까웠네 / 꿀 설기 경단 하고, 메밀 갈아 국수 하소. / 소 잡고 돼지 잡으니 음식이 가득하다. / 들 마당에 차일 치고, 동네 모아 자리 깔고 / 노소차례 틀릴세라, 남녀분별 잘 하시오. / 삼현육각 한 패 얻어 오니, 화랑이와 줄모지라. / 북 치고 피리 부니, 여민락與民樂이 제법이라. / 이풍헌 김첨지는 잔말 끝에 취해 쓰러지고 / 최권동 강약정은 체괄이 춤을 춘다.” 「시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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