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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온 편지

‘과거에서 온 편지’는 농업에 관한 옛글을 소개해 현대인에게 농업의 중요성과 삶의 교훈을 남기며,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가치를 전달합니다.

서유구의 『행포지』 서문에 담긴 농사의 중요성

글·사진 제공. 정명현(임원경제연구소 소장)
사진

행포지 서문

지금 이 시대에 시간과 공간을 아울러.
하루라도 빠트릴 수 없는 필수품 중에
무엇이 으뜸인가?
곡식이다.
지금 이 시대에 시간과 공간을 아울러.
신분의 고하나 지혜의 유무에 관계없이
하루라도 몰라서는 안 되는 일 중에 무엇이
으뜸인가?
농사다.
今夫擧天下之物, 而求其通宇宙·亘古今,
不可一日缺者, 孰爲最乎?
曰“穀”;
今夫擧天下之事, 而求其通宇宙·亘古今,
無貴賤智愚不可一日昧然者, 孰爲最乎?
曰“農”.


(서유구, 『행포지』, 행포지 서문, 1825년)

위의 글은 한 농서農書 서문의 일부다. 『행포지杏蒲志』가 그 책이다. 저자는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 그는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저술한 인물이다. 조선 최고의 농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사실 두 가지. 첫째, 서유구 외에도 그의 부친 서호수, 조부 서명응이 모두 농서를 저술했다는 점이다. 부친의 『해동농서海東農書』, 조부의 『본사本史』가 그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삼대에 걸쳐 농서를 집필한 집안은 이들 대구 서씨 삼대가 유일무이하다. 농학은 집안 내력이었다. 둘째, 풍석은 농학자이면서도 농부였다는 점이다. 그는 농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만 몰두한 게 아니다. 논밭에서 땅을 일궈 곡식을 재배하고, 나무 심으며, 가축 기르는 일을 적어도 15년 이상은 몸소 했다. 농사나 농정에도 관심이 높았던, 동시대의 또 다른 대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농사를 짓지 않았던 사례와 대비된다. 농사에 대한 풍석 자신의 고견은 ‘가학家學 전통’과 농부로서의 ‘현장 경험’이라는 토대에서 나왔던 것이다.

풍석은 조선 후기의 경화세족京華世族 출신이다. 지금 표현으로 금수저 집안이다. 그에 걸맞게 무난히 과거에 합격하고 40대까지 조정의 고위직을 거쳤다. 온갖 진귀한 것을 다 누렸고 귀한 음식도 다 먹어봤다. 그러다 정치적 격랑을 만나 귀농했다. 하루아침에 경제 기반을 상실한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자신의 몸을 놀려서 외아들과 함께 곡식을 생산했다. 43세부터다.

그렇게 궁한 처지에 몰렸을 때, 풍석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 성찰에 몰두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에게 가장 긴요한 물질적 요소는 무엇인가? 이 답을 제시하기 위해 『행포지』 서문 첫머리에서 단도직입으로 묻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사람에게 하루라도 없으면 안 될 사물은 무엇인가? 돈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곡식’이다! 식량이다. 풍석의 질문에 대해 현대인은 공기라느니 물이라느니 대답하겠지만, 이들은 천지에 이미 주어졌기에 서유구에게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독자도 곡식이라는 답에 대부분 수긍할 것이다.

저자는 다시 묻는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지혜가 많든 적든 이들이 하루라도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은 무엇인가? ‘농사’다! 조선에 사는, 아니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반드시 매일 알아야 하는 일이 농사라는 것이다. 당시 조선 선비 대부분은 이 답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첨단 기술에 점점 의존도가 높아지는 우리에게도 매우 생뚱맞은 대답이라 생각하는 이가 많으리라. 곡식과 농사라니!

풍석이 아니었다면 이 두 질문과 답은 나올 수 없다. 농사를 이렇게 신박하게 정의한 조선 사대부는 없었다. 음식이 인간 생존의 기본 요건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렇지만 그 먹을거리를 자신이 직접 생산해야 한다거나, 식량 생산 기술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는 발상을 하기는 쉽지 않다. 잘 나가는 명문가의 일원이, 왜 하필 양반들이 극구 멀리하는 농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인용구 이후에 매우 깊이 있고 조리 있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지금 다룰 순 없겠다.

우리 대부분이 먹을 줄은 알지만 그 식재료가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는 거의 관심 없다. 시쳇말로 ‘안물안궁’이다. 생산 과정을 굳이 알지 않아도 내가 먹고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이리라. 농사에 대한 무지는 현대인들에게 만연되었다. 농사를 모른다 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농사는 농정 관련 부처 공무원, 그리고 국민의 5%도 안 되는 농가 인구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몫으로 당연시한다. 농사는 인간의 필수 요소인 곡식이나 채소, 과일을 생산하는 활동이다. 그 생산은 비단 식량 공급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생산 공정과 그 향유 과정 전체가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토대다.

풍석의 『임원경제지』는 총 열여섯 개 분야로 구성되었는데, 첫 번째 분야에서 곡식 농사를 다뤘다. 그 이름은 『본리지本利志』다. 곡식 농사가 근본이고, 이를 통해 얻은 이익이 진정한 이익이라는 의미의 작명이다.

국민의 95%는 농사에 무관심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농사에서 소외되었다. ‘근본도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밥이나 분식은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즐기면서, 정작 알아야 할 농사에는 무지한 우리를 서유구가 본다면 어떤 심정일까.